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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 김명순
조선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 김명순
  • 서혜란
  • 승인 2021.05.22 14: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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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책
김명순. 생명의 과실(초판본 표지)

 

‘여성작가 전성시대’,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발행하는 잡지 《출판N》2020년 11월호의 커버스토리 제목이다.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지난해 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국내 주요 문학상을 거의 다 여성작가들이 수상했다.

교보문고가 집계한 2020년 한국소설 베스트셀러 30종 가운데 여성작가의 작품이 23종에 달한다. 이 목록에 자신의 작품을 무려 다섯 종이나 한꺼번에 올린 대세 작가 정세랑은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의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썼다. “나의 계보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그것이 김동인이나 이상에게 있지 않고 김명순이나 나혜석에게 있음을 깨닫는 몇 년이었다.”

김명순. 자유연애론으로 여성억압의 굴레를 과감히 끊고 근대의 문을 열어젖힌 대표적 신여성으로 잘 알려진 작가이자 화가 나혜석에 비해서 대중에게는 낯선 이름일 수도 있겠다.

김명순은 평양의 부호 김희경과 기생출신의 소실 산월 사이에서 1896년에 태어났다. 1917년에는 최남선이 발행하던 잡지 《청춘(靑春)》이 시행한 ‘특별대현상’에서 심사위원 이광수의 극찬을 받으면서 기성 작가 이상춘과 주요한에 이어 3등 당선한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로 화려하게 등단하며 명성을 얻었다.

2010년에는 당시 조선의 근대문학을 선도하던 문예잡지 《창조(創造)》에 여성문인으로서는 최초의 동인(同人)이 되었다. 1925년에는 시 24편, 수필 4편, 소설 2편을 묶은 <생명(生命)의 과실(果實)>을 출판했다. 우리나라 신문학 역사에서 여성 문인이 펴낸 최초의 작품집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이 보존하고 있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스스로 “이 작품집을 오해받아 온 젊은 생명의 고통과 비탄과 저주의 여름(열매의 다른 말)으로 세상에 내놓습니다”고 쓴 것처럼, 명예와 기쁨보다는 오욕과

비참으로 점철된 그녀의 생애는 김별아에 의해 장편소설 <탄실>로 엮어져 2016년 세상에 알려졌다.

‘탄실’은 김명순의 어릴 적 이름이자 여러 필명 중 하나이고, 그녀가 쓴 소설 <탄실이와 주영이>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 기생첩의 딸이라는 ‘나쁜 피’의 낙인은 학생시절 동급생들로부터 따돌림 당하는 이유가 되었다.

일본 유학생이던 19살의 그녀는 일본육사 출신의 군인 이응준(그는 나중에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으로부터 강간을 당하고 그 충격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일생일대의 시련을 겪었다. 그런데 모국 신문에서 일방적 비난을 받고 학교에서 쫓겨나 유학생활을 포기해야 했던 쪽은 오히려 그녀였다.

1921년에는 느닷없이 《창조》 동인에서 파문을 당했다. 1924년에는 잡지 《신여성》에 ‘김명순씨에 대한 공개장’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글에서 평론가 김기진은 그녀의 문학을 ‘여성 특유의 애상주의’와 ‘육욕(肉慾)으로 인해 퇴폐하고 황량한 피부에 덧바른 분 냄새’로 폄훼하면서 그 원인을 ‘평안도 사람의 기질’과 ‘어머니 편의 부정한 피’와 ‘처녀 때 강제로 남성에게 정벌을 받은’ 탓으로 돌리는 인격모독을 서슴지 않았다.

소설가 김동인은 1939년에 무절제한 성적 타락을 선각자의 덕목으로 착각하는 신여성을 그린 소설 <김연실전>을 발표했는데, 김명순을 모델로 삼았음을 공공연하게 알렸다. 김동인은 그녀를 ‘남편이 다섯이나 몰려올까 무서워 결혼을 못하는 과부 처녀’라고 조롱하였다.

1925년 매일신보 공채시험에 합격하여 이각경과 최은희의 뒤를 잇는 조선의 세 번째 여성기자가 되었고, 온갖 악의적 소문에도 불구하고 각종 신문과 잡지 등에 시와 소설, 칼럼 등을 기고하던 그녀였지만, 이 사

건을 계기로 조선 문단에서 사라졌다. 이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곤궁하게 생활하던 그녀는 1951년 정신병원에서 쓸쓸히 생애를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설가 김별아의 말처럼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서 그 식민지 남성의 또 다른 식민지였던 여성”으로서 “정당한 문학적 평가를 받을 짬조차 없이 출신 성분과 사생활을 빌미로 난도질” 당한 채로 문학사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김명순이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라는 이름으로 뒤늦게나마 소환되고 기억되게 된 것은 인간적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그것을 굳이 새삼스러운 여성의 타자화로 이름붙이고 싶지는 않다.
 



 

글 서혜란 (국립중앙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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