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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의 상상편지
[노마의 상상편지] 고독에 침잠하라
2021. 12. 08 by 김종면 주필
[노마의 상상편지] 고독에 침잠하라

 

[노마의 상상편지] 고독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외롭고 쓸쓸한 감정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니 긍정적인 뜻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고독사의 그림자도 점점 짙어가는 형국이니 고독이라는 말은 한층 부정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고독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닙니다. 우리가 통상 이야기하는 고독사는 진정으로 고독해서 죽는 것이라기보다는 고독하게 죽는 것을 일컫습니다. 쓸쓸하고 외로워서 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철학적 죽음입니다.  

많은 문학가·철학가들이 고독의 효능을 찬양합니다. 홀로 있는 시간을 사랑한 미국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수필집 ‘월든’에서 “나는 고독처럼 친근한 친구를 만나보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가 하면 독일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오직 홀로 있을 때만 자기 자신일 수 있다며 고독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유를 사랑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인간은 홀로 있을 때만 진정으로 자유롭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하루하루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러한 ‘고독예찬론’은 한낱 관념의 유희에 불과한 것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앞만 보고 달려온 삶일수록 실존의 고독은 더욱 깊을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고독은 우울이나 불안, 공포 같은 부정적인 감정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고독감은 언제든지 선한 영향을 끼치는 고독력으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고독에 저항하며 살아왔습니다. 밥을 먹어도 술을 마셔도 여행을 해도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왔지요. 그런데 지금은 ‘혼밥’이니 ‘혼술’이니 ‘혼여’니 하는 말이 일상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고독저항사회를 넘어 고독순응사회에 살고 있는 셈이지요.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보면 탈(脫)고독의 자취가 뚜렷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 풍경도 그럴까요? 내면의 고독과 외로운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적잖은 사람들이 남모르는 고독앓이를 호소합니다. 

고독은 싸워 이겨야 하는 극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차라리 행복한 동거의 대상에 가깝지요. 문제는 자기 고독을 자기 자신도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평생 추구할 가치가 있는 예술가들도 고독과 힘겨운 씨름을 벌였지요. 한 예로 독신이었던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하루 일이 끝나면 으레 카페나 술집에서 친구 등과 어울리며 외로움을 달랬다고 합니다.

고독의 근원을 다스려야 합니다. 가톨릭 영성 작가로 유명한 토머스 머튼은 고독 속 명상의 전범을 보여준 인물입니다. 미국 켄터키 주의 한 트라피스트 봉쇄 수도원에서 수사 생활을 하기도 한 그는 고독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모든 것들의 선함을 더욱 명확하게 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처럼 견고한 절대 고독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요. 그러나 수도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그러한 관상(觀想) 행위를 통해 고독과의 지루한 줄다리기를 멈출 수 있습니다. 적어도 고독 지옥의 굴레에서는 벗어날 수 있지요. 이래저래 정신적인 삶이 중요해지는 세상입니다.

글 김종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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