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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의 상상편지
[노마의 상상편지] 가족이기주의적 삶의 허실
2022. 02. 15 by 김종면 주필
pixabay

 

아름다운 선율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음표들이 겹치거나 포개어진다고 아름다운 가락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음표들 간의 울림과 조화를 통해 듣기 좋은 음의 흐름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음악의 천재 모차르트가 “나는 서로 사랑하는 음표들을 찾고 있다.”고 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입니다.

석양이 아름다운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녁 무렵의 마지막 빛살, 석양은 그 자체로 황홀경을 연출합니다. 그러나 석양이 진정 석양인 것은 천지 만물의 후광이 되어줌으로써 범접할 수 없는 절대미의 경지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조화의 화신’ 석양은 따로 또 같이 만들어내는 미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 삶은 어떤가요? 서로 사랑하는 음표 같은 삶, 누군가에 멋진 배경을 제공하는 석양 같은 삶을 살고 있나요?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너나없이 아욕(我慾)에 빠져 있어요. 거칠게 요약하면 개인주의 풍조 속에 자기 혹은 제 가족만을 위해 해바라기처럼 살아가는 ‘사로잡힌 존재’입니다.  

인간 공동체에 피와 살이 없습니다. 오가는 정도 잔잔한 삶의 이야기도 사그라들고 있어요. 저마다 자기만의 삶을 살기에 바쁜 ‘칼 같은 인생’들입니다. 주위 사람이 아무리 어려움을 겪어도 자신과 관계된 일이 아니면 오불관언입니다. 동정 없는 세상이지요. 소외가 또 다른 소외를 낳는 단절의 시대입니다. 

가수 나훈아는 ‘가고 싶은 내 고향’이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석양도 흐느끼는 쓸쓸한 타향 저녁 나 홀로 외로이 슬픔에 목메인다 아∼” 이렇게 시작되는 곡이지요. 우리는 이 노랫말처럼 정신적 고아의식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심리적 타관살이라고 할까요? 개인의 나약한 유리멘탈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우리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이 너무 이악합니다.  

사람들이 호두껍질 속 같은 가족이기주의의 동굴에 갇혀 옴짝달싹 못합니다. 아니 자발적 유폐 생활에 젖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재물의 신 맘몬(Mammon)의 노예가 되어 부와 권력을 쫓기에 바쁘지요. 육신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이기적 탐심에 영혼이 썩어가는 줄도 모르고 욕망의 질주를 계속합니다. 그렇게 애면글면 쌓아 올린 거만(巨萬)의 부는 결국 자식이든 누구에게든 대물림 하겠지요. ‘생각하는 인간’이라면 그런 폐쇄회로적 삶에서 무슨 가치를 발견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을까요? 

모차르트는 재산관리 같은 자기 잇속을 챙기는 일에는 서툴렀지만 누구보다 삶을 사랑하고 농담을 즐긴 유쾌한 천재였습니다. 그처럼 순수했기에 천상의 화음을 창조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시인 푸시킨은 모차르트의 음악을 ‘신의 소리(Vox Dei)’라고 했습니다. 그런 신묘한 선율을 듣고도,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장엄한 석양의 위용을 떠올리면서도 욕망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인간의 본능을 탓해야 할까요? 조화옹이라도 소환해야 할까요?

가족이기주의를 ‘악(惡)’으로 규정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맹목에 가깝고 때로는 반사회적 양상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악의 존재 앞에서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아름다움은 우리를 선으로 이끄는 정신의 빛입니다. 삶의 진실은 아름다움에 있어요. 거기에 서늘한 울림이 있고 가슴 벅찬 떨림이 있습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을 많이 보고 듣고 느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탐욕으로 얼룩진 마음의 때도 조금씩 씻어낼 수 있을 테니까요.

글 김종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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